090 PROJECT QUAD
1.^ offset: 오토캐드(AutoCAD)에서 일정한 거리의 평행선을
만드는 기능
2. fillet: 오토캐드에서 둥글게 모를 깎는 기능
3.^ 달항아리를 형상화한 김석철의 밀라노엑스포 한국관이나, 황소
뿔을 단 문훈의 ‘락있수다’ 펜션 등의 사례가 있지만, 과연
이들을 한국적 맥락에서 ‘형태의 자율성’을 추구한 결과물로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쿼드는 지극히 합리적 결과물이다.
다세대주택이자 근린생활시설로서, 최대의
용적률, 최대의 건폐율은 필수 조건이다.
도로사선, 일조사선, 법규가 허용하는 마지막
볼륨까지 짜내야 한다. 건축주에게 이 건물은
필연적 결과물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건물에 도대체 어떤 ‘비평 거리’가 있는가? 또한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고, 궁극적으로 자신의
브랜드를 구축하고 싶은 젊은 건축가에게
이러한 건물은 어떤 가치가 있는가?
젊은 건축가에게 자신의 색깔이라는 것은,
유명한 건축가의 그것과 달리, 건축시장에서
아직 브랜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다른
말로 하면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한 것으로,
그 자체로서는 일을 맡기는 건축주에게는
어떠한 가치가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오히려
젊은 건축가의 색깔은 종종 건축주에게
치기로 간주되고, 건축주의 개인적 취향이나
경제성의 논리에 의해 아주 쉽게 무시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건축가 김진휴와
남호진에게 필연성은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는
유일한 창구다. 결국 건축가의 색깔이라는
지극히 자의적인 것을 어떻게 필연성과
연관시킬 수 있는지, 즉 자의성을 어떻게
필연성에 용해하느냐가 문제의 핵심이다.
쿼드에 대한 설명은, 필연성으로 넘쳐난다.
먼저 각층마다 다른 마감(1층의 노출콘크리트,
2~3층 포천석, 4층 스터코, 5층과 다락의
칼라강판)은 주변 동네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재료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또한 꼭대기
층의 기묘한 다면체는 주변 사선들에 의해
만들어졌고, 도로 쪽에 뚫려 있는 묘한 각도의
창은 그렇게 만들어진 형태의 외곽선에서
오프셋▼1한 결과라고 한다. 심지어 내부의
절묘한 곡면의 공간도, 거창한 영감이나
대단한 사례를 참고했을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오프셋과 접선(tangent line), 그리고
필렛▼2의 결과물이라고 한다. 주변 문맥이 외부
마감재를 결정했고, 도로사선과 일조사선이
건물의 형태를 결정했다. 심지어 꼭대기 층의
형태와 창 모양은 오토캐드가 결정했다.
내부 공간에 대한 설명을 들어보자. 1층의
시원시원한 임대 공간은 시공상 발생한 애매한
반지하 깊이를 수용한 것이고, 꼭대기 층의
재미난 복층 공간은 사선에 의해 만들어진
상부 공간을 수용한 것이다. 주거시장에서
필연적으로 기대되는 것들이다. 또한 입면상
불규칙하게 배치된 2~3층의 창 역시 각 세대에
최대한 여유로움을 제공하는 시각적 통로나
녹지를 확보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심지어 얼핏
보기에 초현실적인 꼭대기 층의 삼각형 테라스
공간 역시, 인접한 건물로부터의 프라이버시,
자연채광, 정남향 등, 필연성에 의해 설명된다.
하지만 2~3층을 한 덩어리로 묶어주는, 포천석
마감에 대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위에서 언급한 필연적 결과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든다. 주변의 포천석 마감과 차별화하기
위해서 최대한 길게 모듈을 설정하는가 하면,
일반적으로 지워버리는 가공흔도 그대로 뒀다고
한다. 또한 오각형 대지의 묘한 둔각 코너 조건도
그대로 수용하여 서로 엇갈리게 했다고 한다.
마치 관행적으로 이뤄지는 ‘필연적’ 결과를
거부하고 ‘자의적’ 태도를 취하는 것처럼 들린다.
라파엘 모네오는 『건축; 형태를 말하다』
(아키트윈스, 2014)에서 장식적 건축, 즉 자의적
건축의 대명사처럼 보이는 안토니 가우디의
건축은 오히려 필연적 구축의 과정이 요구하는
결과라고 주장한다. 가우디는 “자의성을 건축
형태의 근원으로 삼았던 건축가들과는 대척점에
있다”고 하며, “자의적인 것과 상반되는 형식적
일관성을 작업의 토대로” 삼은 근대건축의 두
거장인 르 코르뷔지에와 미스 반 데어 로에와
그 궤를 같이 한다고 설명한다. 코르뷔지에가
철근콘크리트 구조에 기반을 둔 ‘근대건축의
5원칙’을 통해 “건축체계의 결과가 아닌
어떠한 형식적 정의도 피하려”했다면, 미스는
철골 구조에서 “보편적이고 결정적 언어를
정초하려”했다고 한다. 특히 모네오는 “건축
역사의 상당 부분은 자의성을 함축했다는
원죄를 잊게 하려는 건축가들의 용맹스런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하면서, 동시에
자의성이 역설적으로 건축의 필연성의 필수적
전제 조건임을 주장한다. 자의성이 없는 건축적
창작은 있을 수 없으며, 단지 특정한 자의성의
결과물이 오랜 기간 동안 관습화되면서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고 한다. 하지만
모네오는 20세기 말에 이르러 존 헤이덕과
제임스 스털링, 그리고 프랭크 게리에 이르러,
형태는 점차 자율성을 획득해가고 있으며,
이제는 ‘건축가 자신의 충동’에서 비롯된
‘형태의 자의성’을 논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쿼드로 돌아가보자. 지극히 합리적이고
필연적 결과는 사실 건축가의 자의성에 의해
촉발되었다. 즉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 그리고 어떻게든 차이를 만들어내려는
고뇌의 산물인 것이다. 기계가 만들어낸 석재의
가공흔, 오각형 대지 모서리의 애매한 각도,
법규가 만들어낸 가상의 볼륨, 오토캐드가
제공하는 기하학적 체계 등, 모두 건축가가
창의적 욕망, 즉 자의성을 필연성에 용해하는
요소들이다. 문제는 필연성조차 자의적인
것임이 드러난 시대에 살고 있음에도 우리는
왜 아직도 자의성을 필연성 속에 용해해야만
하느냐는 것이다. 또한 모네오는 서양
건축이 필연성에 그렇게도 집착한 이유는,
실증과학이 되고 싶은 건축가들의 욕망
때문이라고 하는데, 과연 우리에게도 그런
욕구가 있는지 의문이 든다. 아울러 모네오가
언급한 ‘형태의 자율성’이라는 맥락에서의
형태가 과연 우리에게 있는지도 궁금하다.▼3
오히려 우리의 필연성은, 서양의 실증과학에의
집착과 달리, ‘자연스러움’에의 강박에 의한
산물일 수 있다. 마치 우리의 산사와 한옥의
아름다움을 자연과의 어울림에서 찾고자 하는
것처럼, 자연의 힘이 건축법규와 시장원리에
의해 대체된 지금, 우리는 법규와 수익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만들어진 자연스런
형태를 아름답게 여기고자 하는 것이다.
필연성에 용해된
자의성의 문제
조한
홍익대학교 교수
090 PROJECT QUAD
1.offset: 오토캐드(AutoCAD)에서 일정한 거리의 평행선을
만드는 기능
2.fillet: 오토캐드에서 둥글게 모를 깎는 기능
3.달항아리를 형상화한 김석철의 밀라노엑스포 한국관이나, 황소
뿔을 단 문훈의 ‘락있수다’ 펜션 등의 사례가 있지만, 과연
이들을 한국적 맥락에서 ‘형태의 자율성’을 추구한 결과물로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쿼드는 지극히 합리적 결과물이다.
다세대주택이자 근린생활시설로서, 최대의
용적률, 최대의 건폐율은 필수 조건이다.
도로사선, 일조사선, 법규가 허용하는 마지막
볼륨까지 짜내야 한다. 건축주에게 이 건물은
필연적 결과물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건물에 도대체 어떤 ‘비평 거리’가 있는가? 또한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고, 궁극적으로 자신의
브랜드를 구축하고 싶은 젊은 건축가에게
이러한 건물은 어떤 가치가 있는가?
젊은 건축가에게 자신의 색깔이라는 것은,
유명한 건축가의 그것과 달리, 건축시장에서
아직 브랜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다른
말로 하면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한 것으로,
그 자체로서는 일을 맡기는 건축주에게는
어떠한 가치가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오히려
젊은 건축가의 색깔은 종종 건축주에게
치기로 간주되고, 건축주의 개인적 취향이나
경제성의 논리에 의해 아주 쉽게 무시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건축가 김진휴와
남호진에게 필연성은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는
유일한 창구다. 결국 건축가의 색깔이라는
지극히 자의적인 것을 어떻게 필연성과
연관시킬 수 있는지, 즉 자의성을 어떻게
필연성에 용해하느냐가 문제의 핵심이다.
쿼드에 대한 설명은, 필연성으로 넘쳐난다.
먼저 각층마다 다른 마감(1층의 노출콘크리트,
2~3층 포천석, 4층 스터코, 5층과 다락의
칼라강판)은 주변 동네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재료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또한 꼭대기
층의 기묘한 다면체는 주변 사선들에 의해
만들어졌고, 도로 쪽에 뚫려 있는 묘한 각도의
창은 그렇게 만들어진 형태의 외곽선에서
오프셋▼1한 결과라고 한다. 심지어 내부의
절묘한 곡면의 공간도, 거창한 영감이나
대단한 사례를 참고했을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오프셋과 접선(tangent line), 그리고
필렛▼2의 결과물이라고 한다. 주변 문맥이 외부
마감재를 결정했고, 도로사선과 일조사선이
건물의 형태를 결정했다. 심지어 꼭대기 층의
형태와 창 모양은 오토캐드가 결정했다.
내부 공간에 대한 설명을 들어보자. 1층의
시원시원한 임대 공간은 시공상 발생한 애매한
반지하 깊이를 수용한 것이고, 꼭대기 층의
재미난 복층 공간은 사선에 의해 만들어진
상부 공간을 수용한 것이다. 주거시장에서
필연적으로 기대되는 것들이다. 또한 입면상
불규칙하게 배치된 2~3층의 창 역시 각 세대에
최대한 여유로움을 제공하는 시각적 통로나
녹지를 확보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심지어 얼핏
보기에 초현실적인 꼭대기 층의 삼각형 테라스
공간 역시, 인접한 건물로부터의 프라이버시,
자연채광, 정남향 등, 필연성에 의해 설명된다.
하지만 2~3층을 한 덩어리로 묶어주는, 포천석
마감에 대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위에서 언급한 필연적 결과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든다. 주변의 포천석 마감과 차별화하기
위해서 최대한 길게 모듈을 설정하는가 하면,
일반적으로 지워버리는 가공흔도 그대로 뒀다고
한다. 또한 오각형 대지의 묘한 둔각 코너 조건도
그대로 수용하여 서로 엇갈리게 했다고 한다.
마치 관행적으로 이뤄지는 ‘필연적’ 결과를
거부하고 ‘자의적’ 태도를 취하는 것처럼 들린다.
라파엘 모네오는 『건축; 형태를 말하다』
(아키트윈스, 2014)에서 장식적 건축, 즉 자의적
건축의 대명사처럼 보이는 안토니 가우디의
건축은 오히려 필연적 구축의 과정이 요구하는
결과라고 주장한다. 가우디는 “자의성을 건축
형태의 근원으로 삼았던 건축가들과는 대척점에
있다”고 하며, “자의적인 것과 상반되는 형식적
일관성을 작업의 토대로” 삼은 근대건축의 두
거장인 르 코르뷔지에와 미스 반 데어 로에와
그 궤를 같이 한다고 설명한다. 코르뷔지에가
철근콘크리트 구조에 기반을 둔 ‘근대건축의
5원칙’을 통해 “건축체계의 결과가 아닌
어떠한 형식적 정의도 피하려”했다면, 미스는
철골 구조에서 “보편적이고 결정적 언어를
정초하려”했다고 한다. 특히 모네오는 “건축
역사의 상당 부분은 자의성을 함축했다는
원죄를 잊게 하려는 건축가들의 용맹스런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하면서, 동시에
자의성이 역설적으로 건축의 필연성의 필수적
전제 조건임을 주장한다. 자의성이 없는 건축적
창작은 있을 수 없으며, 단지 특정한 자의성의
결과물이 오랜 기간 동안 관습화되면서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고 한다. 하지만
모네오는 20세기 말에 이르러 존 헤이덕과
제임스 스털링, 그리고 프랭크 게리에 이르러,
형태는 점차 자율성을 획득해가고 있으며,
이제는 ‘건축가 자신의 충동’에서 비롯된
‘형태의 자의성’을 논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쿼드로 돌아가보자. 지극히 합리적이고
필연적 결과는 사실 건축가의 자의성에 의해
촉발되었다. 즉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 그리고 어떻게든 차이를 만들어내려는
고뇌의 산물인 것이다. 기계가 만들어낸 석재의
가공흔, 오각형 대지 모서리의 애매한 각도,
법규가 만들어낸 가상의 볼륨, 오토캐드가
제공하는 기하학적 체계 등, 모두 건축가가
창의적 욕망, 즉 자의성을 필연성에 용해하는
요소들이다. 문제는 필연성조차 자의적인
것임이 드러난 시대에 살고 있음에도 우리는
왜 아직도 자의성을 필연성 속에 용해해야만
하느냐는 것이다. 또한 모네오는 서양
건축이 필연성에 그렇게도 집착한 이유는,
실증과학이 되고 싶은 건축가들의 욕망
때문이라고 하는데, 과연 우리에게도 그런
욕구가 있는지 의문이 든다. 아울러 모네오가
언급한 ‘형태의 자율성’이라는 맥락에서의
형태가 과연 우리에게 있는지도 궁금하다.▼3
오히려 우리의 필연성은, 서양의 실증과학에의
집착과 달리, ‘자연스러움’에의 강박에 의한
산물일 수 있다. 마치 우리의 산사와 한옥의
아름다움을 자연과의 어울림에서 찾고자 하는
것처럼, 자연의 힘이 건축법규와 시장원리에
의해 대체된 지금, 우리는 법규와 수익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만들어진 자연스런
형태를 아름답게 여기고자 하는 것이다.
필연성에 용해된
자의성의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