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짝웃는독서회 회지(2021년 1월 제185호)

(Seokhoon Kim) #1
달력
남현숙(수필가)

엄마는 제아무리 그림이 좋아도 밋밋


하게 숫자만 박혀있는 달력을 유난히


좋아하셨다.


그것도 음력 날짜를 한눈에 짚어 볼 수


있는 커다란 달력만을 고집했다.


한쪽 벽을 멋있게 장식할 수 있는 세련


된 달력도 많았지만, 그것은 모두 그림


의 떡에 불과했다.


해마다 그렇게 찬밥 신세가 된 묵은 달


력이 라면상자 한가득 쏟아져 나왔다.


해를 다한 달력은 간간이 만두를 빚거


나 지짐질할 때 요긴히 쓰이긴 했지만


대부분 구석 자리를 면하지 못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것 같은 이 종이


도 한때는 귀한 대접을 받았다.


사는 게 힘들어 모든 것이 흔하지 않던


시절, 엄마는 묵은 달력이 떼어지면 그


것을 반듯하게 접어 잘 보관했다가 꼭


필요할 때만 쓰셨다.


그냥 허투루 버리는 법이 없었다.


나물을 뜯어말리거나 늦가을, 메주를 쑤


어 말릴 때에도 이 커다란 종이는 요긴


히 쓰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눈처럼 하얗게 빛나는 달력을 방바닥에


넓게 펴 놓고 동생들과 둘러앉아 두서


없이 낙서나 그림을 그리면서 글을 깨


치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했다.


세상을 향한 온정을 꽃 피워가던 우리


들만의 작은 놀이터였다.


여백이 남을 리 없었지만, 저녁상을 치


우고 난 엄마는 자식들이 쓰고 남은 자


투리의 빈 공간을 찾아 허우적거리듯


서툴게 그림을 그리셨다.


투박한 손으로 어설프게 연필을 잡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본 것은 그때가 처


음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글씨는 단 한 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엄마가 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형체가 없어 한눈에 알아보기 힘들었지


만, 엄마가 그린 것은 작은 새였다.


아침마다 나무 울타리 위에서 새벽잠을


깨우는 참새나, 가끔씩 날아드는 비둘기


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날개를 펴지 못하고 잔뜩 웅크린 채 앉아


있는 엄마의 새는 한결같이 그 모양이 형


편없었지만 뾰족한 주둥이만큼은 연필 끝


에 힘을 줘서 정성껏 그려 넣었다.


고드름처럼 길고 뾰족한 주둥이는 그


길이만 길고 짧았지 언제나 비슷했다.


어둠을 등지고 앉아 투박한 달력의 여


백을 채워 가셨던 그 새가 땅 위의 뭇


새가 아닌 갈매기였다는 사실은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알게 되었다.


높은 파도를 따라 넘실넘실 춤추던 갈


매기는 그림 속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조금씩 철이 들면서 어렴


풋이 엄마의 마음도 헤아릴 수 있게 되


남현숙 수필
Free download 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