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하나님 175
은 타인 본위, 상대 본위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본래 일본에는 이러
한 “사랑”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남녀의 사랑의 접촉을 이상적인 것이라고 했을 때, 유
럽계의 ‘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우리롤 주저하게 한
다. 그것은 반하는 것이며, 연애하는 것, 사모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아니다.. .. 남녀의 결합을 ‘사랑이란 번역어로 생각하는 습
관이 지식 계급 사이에 조성되어 있으므로 얼마나 많은 여성이 절
망감을 맛보아야 했던가.
마음의 습관으로서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의 행위가 없는 일본에
서 그것이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될 때 거기에는 거의 틀림없이 허
위가 발생한다. ...
매일 신문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중분하다. ‘사랑하는데 나를 버렸다.'
라든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가 나쁘다, 라는 등의 사고방식으로 쓰
여져 있다.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연애하고, 사모하고, 집착하고, 강요
하고, 서로 속박하며, 이제는 싫증이 나서 도주하고 있을 뿐이다.
. .. 회개와 기도에 믿음의 본질이 있으며,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기독교적 사랑의 사고 그리고 그것과 관련
된 남녀 사랑의 사고방식이 존재하고 있다, 즉, 믿음으로 하는 기도,
회개 등이 없을 때 부부관계롤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에는
큰 근본적 허위가 존재한다.”
그는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우리는 선의 방향으로 노력을
반복하지만 항상 그곳에서 떨어진다. 그러나 여러 가지 선행이 나
타내는 방향에 하나님이 실존한다.”라는 말을 소개하면서 “사랑이
라는 상승노력이 없는 곳에 마이너스로서의 죄는 실감되지 않을 것
이다."라고 말해, “마이너스를 의식하고, 죄된 것을 의식하는 큰 부
담에서 일본인은 해방되어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토우 세이 씨는 자기중심적인 사랑과 기독교가 가르치는 사랑
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인이 아닌데도, “사랑'에 대한
이해는 핵심을 찌르고 있습니다.
. 신약 성경은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헬라어에는 일본어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