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통신·체신 관련 유물 현황조사 및 역사보존을 위한 정책방안 연구 제^2 장_연구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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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로 미국의 ‘NTSC (National Television System Committee)’방식을 채택한 이 텔레
비전방송국은 시험방송을 거친 뒤 1956 년 11 월 1 일부터 정규방송에 들어갔다. HLKZ-TV
는 상업방송으로서 주요한 수입원을 광고사업으로 잡고 있었으나 당시 우리나라에서 매체
의 효용가치를 인식하는 광고주를 얻지 못했고 또한 경제여건도 좋지 않아 텔레비전수상
기의 보급률도 낮았다. 방송국의 운영난으로 1957 년 5 월 6 일 한국일보로 운영권이 넘어갔
으며 회사명을 대한방송주식회사로 바꾸었으나 여전히 운영에 적자를 면하기 어려웠다.
이 당시 국내의 텔레비전수상기 보급 대수는 처음 개국할 때의 10 배를 웃도는 3000 대 수
준이었다. 1957 년 1 월부터 적용된 수입품 텔레비전에 대한 관세의 인상(186%)으로 텔레비
전 보급은 더욱 위축되었으며 당시 1 대당 통관가격은 37 만 5000 환이나 되었다. 한편 1957
년 9 월에는 주한미군방송(AFKN)도 텔레비전 방송을 개시하게 됨에 따라 미군 PX에서 텔
레비전을 취급하게 되자 일부는 종전 가격의 거의 반값으로 국내시장으로 흘러들어와
1958 년 10 월에는 국내 텔레비전 보급대수가 7000 대로 늘어났다. 1961 년 12 월 31 일 국영텔
레비전방송국(한국방송공사: KBS-TV)이 개국하였다. 한국방송공사 개국 이후 공보부가 1
차로 텔레비전수상기 2 만 대를 도입하여 월부로 보급하고 2 차 보급품부터는 금성사 등에
국산화를 권고하는 등 국내기업에서 텔레비전수상기 생산준비를 하는데 주력하게 하였다.
1964 년 12 월 7 일과 12 일에 동양방송(TBC-TV)은 서울과 부산에서 각각 개국을 하게 되었
다. 이렇게 텔레비전방송이 본격화되고 또한 시청가능지역이 거의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
됨에 따라 텔레비전수상기의 수요도 급증하였다. 이와같이 텔레비전방송이 본격화되고 활
발해짐에 따라 당시 수입에만 의존하던 텔레비전수상기의 완제품을 생산하고자 노력하였
다. 금성사는 일본의 히타치와 텔레비전수상기 제작에 기술제휴를 하고 1966 년 7 월 1 차
부품도입분인 500 대의 수상기 생산에 박차를 가하여 이해 8 월 1 일 국내 최초의 텔레비전
수상기(모델 VD-191탁상형)를 출시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967 년에는 동남전기공업주식
회사가 일본회사와 기술제휴하여 텔레비전수상기를 생산하고 한국마벨주식회사는 미국
RCA와 기술제휴하여 RCA텔레비전수상기를 생산하였다. 이 당시 각사제품의 특징은 금성
사와 동남전기가 가정용에 주력하여 중류층 이상을 목표로 보급한 데 반하여 한국마벨은
많은 사람이 함께 시청할 수 있는 23 인치 정도의 대형 텔레비전수상기를 제작 농촌과 교
육기관 등을 대상으로 하였다.
수상기의 국산화율은 65%였는데 1966 년 1 만 500 대를 생산하였고 1969 년에는 7 만 430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