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의 힘
김영숙(시인‧수필가)
(2020 문학시선 수필 등단작)
바람 소리 드센 산 아래 우뚝 선 아파
트 현관 앞
툭! 묵직한 박스가 발밑에 걸린다.
‘남해에서 정옥순
부산에 김영숙 받아라‘
핸드폰 불빛에 엄마 이름이 유난히 크
게 보인다. 이 상자를 채우기 위해 몇
번을 종종거렸을 팔십 노모의 거친 숨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든다. 파김치가 되
어 퇴근한 나의 그리움도 꿈틀거린다.
택배 상자를 풀자 갇혔던 상추가 인상
을 펴고, 쭉 뻗은 단배추 위에 나란히
누운 아삭 고추들, 향긋한 깻잎 냄새가
코끝을 간질이고 데구르르 굴러 나온
호박, 뿌리 채 누운 잔파, 한쪽에 웅크
린 생선 봉지, 켜켜이 쌓인 떡 봉지. 부
지런히 골라 담던 분주했던 손길이 보
인다.
박스 안쪽에 야무지게 접힌 쪽지 한 장
이 눈길을 끈다.
‘숙아! 엄마다.
너 주려고 꽃게 사러 시장에 세 번을
갔다 왔다. 채소는 꾹꾹 눌러져 찌그러
져도 털고 씻으면 다시 되살아난다. 사
과 2 개는 준이 민아 깎아 주고, 박카스
는 석서방 먹이고, 고구마 젤리는 심심
할 때 먹어라. 멸치 담긴 통에 귀한 거
있다. 잘 챙기고
너 땜에 엄마는 평생 당당하게 살았다.
우리 딸 고맙다.‘
광고지 뒷면에 삐뚤삐뚤 눌러 쓴 엄마
흔적에 울컥했다.
자주 찾아가지도 못하는데 뭐가 고맙다
고.. 죄송한 마음에 애꿎은 택배 상자만
만지작거렸다.
정리가 끝나갈 무렵, 작은 반찬 통에 담
긴 멸치 사이로 하얀 뭉치가 보인다. 화
장지 뭉치를 풀자 또르르 반지 하나가
내 발 앞에 멈추었다. 반지를 들고 한참
을 멍하니 바라봤다. 고등학교 다닐 때
사드린 금반지였다.
겨울 방학 때 집에 갔다가 우연히 듣게
된 엄마 친구분들의 자랑.
“내 손 좀 봐, 울 아들이 생일에 사주
더라. 내는 결혼기념일에 딸이 장만해
줬는데, 숙이 엄마! 너는 없나? 다들 바
쁘다더니 요런 것도 신경 안 써드나?”
순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엄마는
너털웃음으로 넘겼다.
그런 엄마 모습이 더 아프고 속상했다.
그날 이후, 주말 알바를 시작했고 꼬박
일 년을 모아 반지를 샀다. 동그란 링
하나에 얼마나 가슴 벅찼는지 모른다.
나도 해줄 수 있다는 자신감, 다시는 울
엄마 기죽지 않겠다는 안도감. 실타래처
럼 꼬였던 생각들이 스르르 풀렸다.
봄동의 수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