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올케언니
위연실( 들고은 )수석운영위원
'너희 아버지 같은 분이 아버지여서 너
는 참 좋겠다.
모시 한복을 입으신 모습도 얼마나 고
매해 보이는지, 박학다식(博學多識)하시
면서도 언제나 겸손하고 인자한 미소로
...'
어려서부터 우리 집을 들락이던 내 친
구들의 부러움 섞인 소리다.
1917 년생이시니 일제강점기를 고스란히
겪어 오면서, 장독대 밑에 으슥한 곳에
서 태극기를 그려 배포하시는 등, 청년
시절부터 숨은 애국 운동을 많이 하시
다가 고문도 숱하게 당하셨다면서, 연세
가 들어가시면서는 여기저기 아프다 하
시곤 했다.
아버지의 어렵고 무서웠던 지난 세월
이야기는 참으로 많았다.
그중에서도 비행기 태우기, 거꾸로 물
먹이기, 손톱 밑 찌르기 등의 악랄한 수
법의 일제의 고문 등을 당하셨다는 대
목을 들을 때면 우리 4 남매는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그뿐인가
평안도가 고향이셔서 공산주의를 피하여
1·4후퇴에 갖은 고생을 하면서 피난을
오셨다. 엄마와 오빠들을 데리고 목숨을
담보로 결정하신 현명한 선택으로 전쟁
이 끝난 후 나와 남동생은 남쪽에서 태
어났다.
지금 우리들에 비하면 참으로 불행한
세대였다는 생각이 든다.
내내 교직에 계시다가 올곧은 성품이,
후배들의 길을 열어 줘야 한다면서 정
년 전에 사직하시는 바람에 우리는 그
덕으로 지독한 가난도 겪어야 했다.
각설하고..
영화 배우 못지않게 잘생기신 우리 아
버지는 엄마가 먼저 가시고 몇 년 후에
잠깐 치매가 왔다. 인품 닮아 그랬는지
크게 애먹이지도 않고, 그리도 멋쟁이
신사가 군것질감을 드리면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좋아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지금도 가끔 그 이야기를 꺼내어 아버
지 생각을 하게 하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인가, 올케언니가 거실 청소를
하고 있는데 '이거 어떡하지?', 이러시
는 아버지 혼잣소리가 들려와서, 왜 그
러시느냐고 물었더니만 변을 보신 것
같다, 하시더라고.
기저귀를 하고 계시니 치우면 되지 뭘
걱정이시냐면서, 천사 같은 우리 올케언
니가 보자고 했더니만 '자네는 여자고
나는 남잔데 어떻게?.. '이렇게 말씀을
하시더란다.
저는 자식이고 아버님은 부모님이시니
괜찮다고 언니가 말씀드리니까, 울아버
지 치매 중에도 하신 말씀이 시쳇말로
대박이다.
들고은 수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