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통신체신 유물현황조사 정책연구_2021

(ksy) #1

제 2 장_연구의내용 정보·통신·체신관련유물현황조사및역사보존을위한정책방안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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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라디오방송의 발전사


가. 라디오 방송의 역사


1915 년경 일제강점기 시기에 한국 최초의 무선전화 송수신 시험이 경성우편국(현 중앙


우체국)과 조선총독부 체신국(현 세종로 광화문우체국) 건물에서 실시되었다. 1926 년 11 월


31 일에는 사단법인 경성방송국이 설립되어 이듬해인 1927 년 2 월 16 일 출력 1 ㎾ 주파수


870kHz로 첫 라디오방송을 개시하였다. 초창기의 라디오방송은 단일 채널을 통한 한국·
일본 양국어의 혼합단일방송으로 한국어와 일어방송 시간비율은 1:3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 뒤 시간비율은 몇 차례의 변화를 겪었다. 방송내용은 주로 일본어방송인 경제시황보도
와 한국어방송의 물가시세·일기예보·공지사항 등이었다. 이 당시의 수신기 보급상황을
보면 개국 1 주일 후인 1927 년 2 월 22 일 현재 등록된 라디오수는 총 1440 대였고 이 중 일본
인이 1165 대 우리 나라 사람이 275 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해방 이후 1947 년 1 월 2 일 국제
무선통신회의에서 HL이라는 호출부호를 할당받으면서 JODK는 HLKA (현 KBS 1 라디오)로
바뀌게 되었다.

나. 라디오 수신기(광복이전)16)
라디오방송 초기 수신기는 감도조절이나 음량조절을 위하여 공중선선륜과 동조선륜을
원접하여 이동하면서 적당한 감도점을 찾아내어야 하였는데 황철검파기를 사용한 수신기
는 감도점을 찾기가 불편해 잘 이용되지 않고 전지식 광석수신기가 감도의 양호성 때문에
많이 이용되었다. 또한 전지식 진공관수신기는 외국제품으로서 나팔을 울릴 수 있어서 여
러 사람들이 한 자리에서 들을 수 있었다. 당시 수신기의 소리를 내게 하기 위해서는 공중
선결합장치동조·고주파동조조절회로·검파회로동조 등과 음량조정까지 합하여 최소한 4
개소는 만져야 하였으며 이 중 1 개소만 조정이 변동되어도 수신감도는 저하되는 등 그 조
정이 어려웠다. 또한 이 때의 라디오수신기를 유지하는 데 드는 전지소모량이 막대하여
일반대중용으로 보급되기는 불가능하였다. 여기에 한국어와 일본어인 양국어혼용 단일방
송으로 인하여 청취자들의 불만이 누적되어 수신기 보급은 극히 부진하였다. 1929 년 말에
1 만 대를 넘어섰고 1932 년 말에는 2 만 562 대에 머물렀다. 따라서 경성방송국(JODK)은 수신

1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발췌 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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