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통신·체신 관련 유물 현황조사 및 역사보존을 위한 정책방안 연구 제^2 장_연구의 내용
2 절 - 유 선 통 신
가공나선로에서 중계코일을 철거하고 그 대신에 3 통화로 방식의 O형 반송단국장치를 설
치하여 최고 30kHz까지의 전송주파수를 사용함으로써 시외전화회선 수가 크게 증가되었
다. 이 경우에는 물론 가공나선에 O형 반송교차를 실시하여야 하는데 이 때에 사용하였던
교차철은 재래에 사용하였던 일본식 교차철 대신에 미국식 교차철인 포인트(Point)형 교차
철 스팬(Span)형 교차철 및 드롭(Drop)형 교차철과 W형 교차철 등이었다.
바. 나선반송회선
1961 년도 말의 시내전화선로를 살펴보면 가공케이블이 949km 지하케이블이 400km 가
공나선로가 20061km로서 가공 나선로가 케이블선로의 15 배가 되었다. 또 시외전화선로의
경우 케이블선로가 1186km 가공 나선로가 58634km로서 가공 나선로가 케이블선로의 49
배였다. 1948 년에서 1961 년까지 13 년 동안의 전화선로는 가공나선로가 핵심을 이루고 있
었는데 시외선로는 단선식 회선을 복선화하였고 시내선로는 가공나선을 케이블화하였다.
당시 확장된 회선은 주로 나선과 나선반송회선 및 10 콰드 무장하케이블 반송회선이었다.
무장하케이블 반송시설은 대부분이 휴전 후에 복구 내지 12 통화로 방식으로 신 증설한 것
으로서 휴전 후 자체 예산으로 3 통화로 나선반송 전화시설 6 대가 설치된 후 미군으로부터
C형 반송시설을 이양 받았다. 5·16혁명 당시 반송회선의 전 시외회선에 대한 비율은 회
선장에 있어서 60% 회선 수에 있어서 37%를 차지하게 되었다. 시외 전송로용 반송장치가
국내에서 제작되기 시작한 것은 1960 년의 나선용 3 통화로 반송장치가 처음인데 그것이
K-3A형이었다. 뒤이어 1961 년에는 K-3B형이 사용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나선반송단국장치
였다. 1937 년에 처음으로 케이블용 반송전화 단국장치가 도입되었으나 1960 년대 말까지도
나선반송 단국장치가 대종을 이루었다.
사. PEF절연케이블 (1970년대)
종이절연과 연피의 케이블은 가공으로 가설하였을 경우에는 구멍이 뚫어지는 이른바 전
혼고장이 발생되고 지하에 포설하였을 경우에는 전식고장 및 화학부식고장 등이 발생되고
또 교량에 첨가하였을 경우에는 진동균열고장이 발생하였다. 일단 연피에 구멍이 뚫어지
면 물이 들어가 전회선고장이 될 뿐만 아니라 납은 그 자원이 점차 고갈되어 간다는 등의
결점을 갖고 있다. 그런데 플라스틱을 전화케이블의 외피와 심선절연에 사용하면 연피케
이블에 비하여 장점이 많았다. 우리나라에서 1970 년대부터 생산된 PEF절연 시내전화케이